선진국 주도로 현지 생산 강화를 요구한다. 우리나라 제조기업들의 해외투자는 ‘저임금 활용’과 같은 비용 절감이 아닌 ‘현지 시장진출’을 위해 이뤄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생산기지 역할을 하던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미래 생산기지로 낙점 된 인도 등 신흥국에서도 투자는 더 이상 비용의 관점이 아닌 시장진출 목적이 대부분이다. 교역의 지역주의화와 자국 우선주의가 결합된 까닭이다.
특히 고부가가치 산업일수록 낮은 생산단가보다 수요자에 대한 시장 접근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2차전지, 반도체 등 신성장 산업이 빠른 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초기 시장 선점을 위한 국내기업들의 글로벌 협력 확대가 요구된다. 여기에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확대로 무역장벽이 높아지면서 이를 우회하기 위해 시장 규모가 큰 국가에 대해 현지 생산이 확대되고 있다.
세계적 트렌드 변화에 기업이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은 긍정적이다. 상대적으로 내수 시장이 작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달갑지 않다. 그동안 수출을 통해 이룩한 제조업 강국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제조업 국내 고용은 2015년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다. ILO(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2015년 대비 2019년 한국 제조업 취업자 수는 18만명 감소했다. 글로벌 생산기지로 활용된 중국 역시 감소했다. 공급 측 개혁 일환으로 이뤄진 산업 구조 조정과 제조업부문 임금 상승, G2 분쟁 등으로 생산기지 이점이 약화됐다.

반면 미국(+49만명), 일본(+34만명), 독일(+25만명)은 증가해 대조적이었다. 한국은 선박수주 급감에 따른 조선업종 구조조정과 자동차 업종 구조조정이 고용에 타격을 입혔다. 반면 미국과 일본, 독일의 제조업 취업자 증가는 금융위기 이후 자국 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제조업 기반 강화와 함께 기업의 리쇼어링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로 판단된다. 공급망 관련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자국 시장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생산기지의 리턴이 가능했던 것이다.
중국과 미국, 일본, 한국의 해외투자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자국 내 제조업 취업자가 증가한 일본과 미국은 해외투자법인의 제조업 현지고용 인원이 각각 22만명, 1만명 감소했다. 반면 한국의 현지고용 인원은 43만명 급증했다. 국내 고용 인원 감소폭을 상회하는 수치다. 중국 역시 전체 업종 대상 해외투자법인의 현지 고용 인원이 104만명 증가해 제조업 생산기지 이동이 확인된다.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한국 비중도 줄어들고 있다. UN에 따르면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한국 비중은 2015년 3.2%에서 2020년 3.0%로 줄었다. 동기간 중국은 26.3%→28.6%, 일본 7.5%→7.7%으로 늘었던 반면 미국 17.5% → 16.9%로 감소했다. 고용으로 확인되는 제조업 모멘텀은 선진국이 중국을 역전했으나 공급망 구조 전환이 상대적으로 더딘 만큼 중국이 세계 최대 생산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선진국 내 생산 비중이 확대되지 않았음에도 한국 비중이 축소되는 것은 중국의 산업구조 고도화 영향이 큰 것으로 판된다. 선진국 중심의 신공급망이 자리잡기 시작할 2025년부터 선진국 생산 비중 확대가 예상되며 한국의 국내 생산 비중은 추가로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2000년 중반 중국 중심의 공급망 발전에는 국내 제조업 고용과 생산이 동반 호조를 보였다. 금번 제조업 투자가 타격을 받는 이유에는 (1) 지리적 접근성 차이, (2) 해외진출 배경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다. 인건비를 제외하고 물류 비용과 시간 등에서 중국 현지 생산과 차이가 크지 않다. 한국의 상대적으로 높은 인적, 물적 인프라 활용 측면에서 현지 생산 유인이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공급망에서 한국을 포함하는 이점이 비용 측면에서 크지 않다. 지리적으로 멀어 운송 비용 증가가 수반된다. 부산과 상해 간 해상운임에 비해 부산과 LA, 부산과 로테르담 간 해상운임은 약 50~70배 비싸다. 지난 30년 동안 산업화가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한국 단위노동비용은 미국과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빠르게 상승했다.

과거 해외진출 목적은 비용 효율화 관점에서 이뤄져 상대적으로 원가 부담이 낮고 마진 확보가 가능한 고부가가치 중간재를 중심으로 생산 유발 효과가 발생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현지시장 진출을 위한 투자가 주를 이루며 미국과 유럽이 요구하는 것은 자국 내 공급망 구조의 수직계열화다. 시장 개척이 이뤄지더라도 국내 제조업의 생산유발효과(반사수혜)는 과거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제조업 생산 여력 축소는 이미 관찰되고 있다. 제조업 국내투자 대비 해외직접투자 비율은 2010년도 중반만 하더라도 한 자릿수 중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G2 분쟁이 본격화된 2018년부터 해외투자가 급증하면서 2019년 기준 국내투자의 10%를 상회하고 있다. 제조업 뿐만 아니라 전산업 기준 설비투자의 국내와 해외 간 격차는 코로나 이후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

국내 제조업 공동화 속에 한국 기업과 경제 간 탈동조화가 심화될 전망이다. 2010년 초반부터 수출과 제조업 생산 간 상관관계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는 수출물량 증가율이 1%p 개선될 때마다 제조업 생산 증가율이 0.6%p 확대됐으며 유의미한 정(+)의 관계를 보였다. 하지만 2012년부터 2019년 까지는 수출물량 증가율이 1%p 향상될 때 제조업 생산은 0.5%p 개선에 그쳤다. 두 변수 간 설명력까지 다소 낮아졌다.

수출 호조가 제조업 생산 증가로 이어져 가동률 상승, 투자 확대, 고용 창출 등으로 연결돼야 내수까지 긍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반도체 제조업을 중심으로 설비투자가 반등했으나 제조업 일자리는 여전히 감소세다. 즉, 수출 호조가 제조업을 통해 내수 개선으로 원활하게 확산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제조업의 생산시설 해외 이전은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며 구조적 내수 부진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미 2010년도 초반 아세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외 공장 이전이 한 차례 이뤄지면서 이러한 흐름이 관찰됐다.
2012년부터 국제수지 기준 상품수출과 통관 기준 수출 간에 확연히 차이가 난다. 통관 기준 수출에서 제외되는 가공무역과 중계무역이 국제수지 기준 상품수출에는 포함되기 때문이다. 가공무역은 국내 기업이 해외 가공업체에 원재료 및 반재료 등을 제공하고 직접 제3국의 고객에게 수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경공업 제품에 집중되어 있으며 최근 반도체도 중국과 아세안 해외 공장에 공급돼 완제품 형태로 현지나 제3국에 판매돼 이에 집계된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서의 수출이 국제수지 기준에는 포함되나 통관 기준으로는 빠진다. 당연히 GDP와 체감 경기 간에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해외 공장에서의 수출 확대는 GDP 증가로 반영되나 국내 일자리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 는다. 수출 호조가 내수로 연계되지 못하는 이유다.

가공 무역은 원재료에 해당되는 반도체 등을 해외로 공급하기 때문에 통관 기준 수출과 국제수지 수출 간의 간극만 벌릴 뿐 방향성에 차이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중계무역이다. 중계무역은 거주자가 해외에서 상품을 구입해 자국으로 반입하지 않고 원상태 그대로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무통관거래를 의미한다. 최근 스마트폰, TV, 컴퓨터 등 해외 현지법인이 물건을 생산해 판매하는 과정에서 마진을 상품수지(중계무역순수출)에 계상한다. 중계무역은 오로지 해외에서 생산과 판매가 모두 이뤄져 한국 국경 내에서 직접적 경제활동이 전무하다.
가공무역과 중계무역 증가를 통해 현지생산 확대를 가늠할 수 있다. 가공무역과 중계무역 모두 한국 영토 내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이 기존보다 축소되는 만큼 한 국 GDP와 체감경기 간 격차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중계무역순수출은 2011년 51 억달러에서 2021년 221억달러로 10년 만에 4배 증가해 전체 경상수지의 25%를 차지한다. 한국 국제수지 및 GDP의 과대계상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 기업이 해외 생산을 확대할수록 기업과 국가 간 펀더멘탈 괴리는 심화된다. 금융시장 측면에서는 국내 채권 및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간 디커플링이 나타난다. 기업 펀더멘탈을 기반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주식시장은 실적 개선과 함께 우상향 흐름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반면 기업 실적 호조에도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는 등 성장이 제약될 경우 한국 원화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절하될 수밖에 없다. 또한 시장금리도 저성장으로 오름세가 제한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