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자립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외교, 안보적 측면에서도 중요해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은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 안보적 관점에서 교역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즉각적 경제 및 외교 보복 조치에 들어섰으며 세계 각국은 어느 진영에 서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있다.
그 동안 유럽은 에너지를 매개로 러시아와 밀월 관계를 이어갔으나 안보 위협에 미국이 주도한 경제 제재에 동참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몇몇 국가들이 러시아산 원자재까지 제재 범위를 확대하는 것 을 반대해 제재 범위는 원자재를 제외한 곳에 한정된다.
중국과 인도는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산 원유 수입까지 추진 중에 있다. 특히 인도는 미국과 일본, 호주와 함께 중국 견제 성격의 안보협의체를 만든 ‘쿼드4’ 국가임에도 러시아 제재에 반대한다. 이스라엘과 인도네시아, 사우디 아라비아, UAE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도 제재에 동참하기보다 중립적 태도 를 유지한다. 미국 주도로 질서정연했던 국제질서는 각국의 이해관계 속에 복잡하 고 다원화되고 있으며 신냉전으로 변모 중이다.

물품의 적시성 있는 제공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면서 안보적 측면에서 필수재를 확보하는 움직임이 강화된다. 즉, 통상에 외교, 안보적 요소가 강화된다.
1980년대 필수재였던 에너지를 확보하는 과정은 이를 잘 드러낸다. 1980년대 1차,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주요국은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 모두 공통적이었다. 에너지 자원은 경제활동에 필수재이나 중동과 러시아 등 일부 지역에 편중됐다. 국가별로 안정적 에너지 자원 확보가 정책 목표였다. 4차 중동전쟁 발발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OPEC은 석유 수출 금수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발생된 1차 오일쇼 크 이후 미국은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에 몰두했다.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과 석유 관련 시설을 보호해주는 대신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든 석유 결제에 미국 달러만 사용하도록 하는 ‘페트로달러’ 체제를 확립 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에너지 무기화에 직면한 미국은 이라크를 간접적으로 지원해 이란-이라크의 대리전을 치르게 했다.
1차, 2차 오일쇼크를 경험한 뒤 오일 메이저들은 투자 활동을 확대했다. 미국의 원유 채굴 구조물 순자산 규모는 1975년에서 1985년 연평균 5%씩 늘었다. 해당 기간을 제외하면 원유 채굴 구조물 순자산 규모는 증가한 적이 없다. 공격적인 투자 활동과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산 중단까지 가세하며 유가는 급락하게 된다. 1980년대 전반까지 악화됐던 원유 수급은 후반으로 가며 완화됐다.

2010년대 미국의 셰일오일 개발로 1980년대에 비해 지역별 편중도는 완화됐다. 그럼에도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 선진국은 에너지 자립도가 낮다. 러시아 제재를 두고 국가별로 차별적 반응이 나타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국가는 공통적으로 (1)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거나 (2) 무기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반면 2012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 반도 병합 사태 등에도 수동적 입장을 견지했던 미국이 금번에 적극적 태도를 보인 것은 미국이 에너지 순수입 국가에서 순수출 국가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유럽은 에너지 순수입 국가이며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원자재 제재 등 강도 높은 제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 내에서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기로 한 것이 최선이다.
친환경 정책을 강화하며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고자 하나 (1) 투자 소요의 시간과 (2) 친환경 에너지의 간혈성 등으로 단기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러시아와 극단적 대립을 회피하는 가운데 단기 에너지 안보 공백을 미국과 중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메울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과 인도 등 에너지 순수입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미국의 에너지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영향력이 약화된 중동 및 아프리카 대신에 그 자리를 중국과 러시아가 차지했다.
